오늘의 묵상(2021년09월10일)
오늘의 묵상(2021년09월10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우리 나라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자꾸 한국의 정치인들을
삐딱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여당, 야당이 서로 하는 짓을 보면
저 속담이 그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을까요?
‘국회의사당' 대신 ‘똥 묻은 개 집합소’
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만 실소를 합니다.
유식한 체 한 번 할까요?
언젠가 함석헌 성생님의 글을 읽다가
배운 것인데요.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치국(治國)은 약팽소선(若烹小鮮)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굽은 것과 같이
정성을 다하고 세심해야 한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틈(虛)과 화(禍)가 보이면
분구힐지강경(糞狗詰之糠)이 된다.
즉 “똥 묻은 개들이 겨 묻은 개를
나무라며 짖어 댄다.”
어쩌면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 나라 정치판을 미리 예견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시지요.
요즘은 이 속담대로 세상 세태가
‘강견(겨 묻은 개)’을 향해 짖어대는
‘분견(똥 묻은 개)’의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기막힌 세태가 되었는지요.
왜 일까요?
분견이 강견을 손가락질하고
나무라는 행위가 당연시 된 것은
그래야만 분견의 구린내가
희석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는 실정은 아닌지요..
요즘 뉴스공장인가요?
김어준이란 사람..
불공정 방송인이라고 비난을 받던데..
난 그 사람 코털이나 깎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도 제법 든 사람이
지저분한 머리에
구역질 날 듯한 보기 흉한 수염..
좀 다듬기라도 하지…
그 사람은 아주 노골적인
권력에 맛들인 하수인인 것 같은데..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 등 제3지대가
자칫 “똥이나 겨나 도토리 키 재기 아니냐”
하고 넘겨버리면 판단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실종되는 순간이지요.
오늘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준열한 꾸짖음입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이겠지요.
하지만 쉽지 않지요.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앞서 나타납니다.
기분이 언짢거나 마음이 섭섭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좋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쁜 모습만 눈에 뜨입니다.
그러니 평소의 마음 상태가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음이 평화스러우면 많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어요?
평화를 위해 애쓰면,
불평하고 싶은 충동 역시
억제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눈의 들보를 빼는 작업은
평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의 평온을 청하는 기도이지요.
세상에 완벽한 만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80퍼센트의 만족과
20퍼센트의 불만이 ‘정상’이랍니다.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60퍼센트 만족과
40퍼센트의 불만만 있어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 것 같은데요.
어쨌든 100퍼센트 만족은
오히려 위험할 것 같습니다.
신천지나 만민교회, 승리재단 등등의
이상한 교회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신앙생활에서의 100퍼센트 만족은
자칫 광신으로 흐르기 쉽거든요.
대인 관계에서는 여차하면
정신적인 문제로 발전할 것 같고요.
어느 정도의 불만이 ‘긴장을 유지시켜’
건전한 관계를 지속시켜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또 완전한 만족을 누린다면
더 나은 발전을 위한 노력도 없을 것이고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지도 않을 것 같네요.
절제하지 않으면 만족은 없다고 봅니다.
지금의 처지를 만족의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눈의 들보를 아는 일일 것입니다.
절제하지 않기에 눈이 멉니다.
애욕에 눈멀고, 돈에 눈멀고, 권력에 눈멀어
자신을 탓하고 남을 탓하게 됩니다.
우리는 제발 분구힐지강경(糞狗詰之糠)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편안하고 복된 주말 맞을
준비 잘 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