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1년08월12일)
오늘의 묵상(2021년08월12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며칠 전에 뉴스를 들으니
샤@ 라는 명품 회사의 보안망이 뚫려
고객정보가 모두 유츨되었다더군요.
요즘처럼 보이스 피싱이나
스마트 폰, 개인용 컴퓨터가 해킹이 되어
엄청난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보니
고객들은 불안하겠죠.
어느 고객이 전화를 걸어 해결책을 묻자
탈퇴하면 회원정보가 삭제되니
탈퇴하면 된답니다.
그 대신 AS 라던가 고객이 누릴 혜택은
불가능하다… 이런 대답이네요.
무슨 이런 나쁜 배짱 회사가 있을까요?
미국이나 영국이나,
하다못해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저렇게 고자세일 수 있을까요?
그래도 좋다고 명품 매장에
새벽부터 줄을 서서 사는 한국인들,
그들은 누구일까요?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은
모두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동네 노래방은 벌써 몇 달 째
문을 열지 못하고
빚에 쪼달리다가 자살하는 일까지 빈번한데
손 가방 하나를 몇 천 만원에 사들이고
더 살게 없나 두리번거리는 저들은 누구일까요?
그 돈은 다 어떻게 벌었을까요?
10년 전쯤, 중국에서 돌아와
한동안 결식자들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했습니다.
푸드 뱅크에서 음식을 가져와
재포장을 하고 집집을 다니며 배달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이렇게 굶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또 느낀 것은..
골목마다 교회 없는 골목이 없고
골목마다 미장원 없는 골목이 없더라..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하나가 10사람의 식사만 제공해준다면
한국에 결식자는 없을 거다.
미장원 하나가 10가구와 연결만 되면
한국에 고독사는 없을 거다..
오늘 한 가지 더..
명품 사는 가격의 십분의 일만 거두면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없을 것 같다..
추가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라는
여호 3,7-17 까지의 중요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출애굽으로 당신 백성을
노예살이에서 자유의 삶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주님은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요르단 강을 건너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몸소 약속의 땅으로 이끄십니다.
계약의 궤는 하느님 백성을 앞장서 가면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고
요르단 강을 건너는 사건은
하느님 구원의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 노예살이에서
자유와 생명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출애굽 사건과 요르단 강을 건넌 사건은
모두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인 마태오 18, 21–19,1의
핵심 내용입니다.
세상의 죄악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고
거기에 따른 무절제한 복수로
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죄악은
하느님의 무한한 선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습니다.
무한용서와 절대적인 선만이
이 세상의 죄와 악을 억누를 수 있으며
아낌없는 사랑만이
세상의 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탈렌트’는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장 높은 ‘화폐 단위’랍니다.
유다인들도 사용은 했지만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액수가 어마 어마 하거든요.
기록을 보면 로마인들은
‘한 탈렌트’의 가치를
‘금 33kg’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어제 2021년 8월12일자 금값을
인터넷으로 조회해 보았더니
국내 금값은 1돈(3.75g)당 대략 28만 원입니다.
우리가 금 거래소에서 살 때는 281,000
팔 때는 266,000원입니다.
따라서 한 탈렌트(금 33kg)라면
24억 5천만원이 넘는 엄청난 큰돈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을 탕감해 줍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조건도 없었습니다.
완벽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하지만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를 고발해 돈을 받아 내려 했던 것이지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화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용서’를 베푸셨지만,
인간은 ‘작은 용서’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기억한다면,
가족이나 이웃의 잘못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임금은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남자는
단돈 백 데나리온의 미련 때문에
‘새 삶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탕감받은 돈’은 망각하고
‘받을 돈’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실수는
결코 없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