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1년06월02일)
오늘의 묵상(2021년06월02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어제 오후에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신의 부작용을 우려해서인지
마님과 딸들도 괜찮은지 걱정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태연한 사람은 백신 접종 당사자인 저 뿐이네요.
물론 실비아 마님은 10일 후에 자기 차례가 오니
워낙 겁이 많고 심약한 사람인지라
많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백신을 맞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무런 이상 증세 없는
건강한 몸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빨리 전 국민이 모두 백신을 접종하여
마스크 없는 호흡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제1독서에 나오는 토빗은
자선을 베풀며 의롭게 살았지만
새 똥이 눈에 떨어진 후 온갖 치료에도 불구하고
실명을 하게 되어 많은 고생을 합니다.
일도 할 수 없어 아내인 안나의 노동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합니다.
안나도 착하고 과묵하며 헌신적인 여인이었지만
너무 힘들었을까요?
어제 독서에서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하고
항의를 하며 쏘아붙이기까지 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자선을 행한 결과가
고작 눈이 먼 것이냐? 는 뜻이겠지요.
저보다 나이는 조금 적지만
제가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현재는 우리 본당의 총구역장에 울뜨레아 간사에,
훌륭한 연령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 바오로 형제가 얼마나 오지랖이 넓은지
남들이 어려운 꼴은 보지 못합니다.
저의 오지랖도 만만치 않은데
바오로 형제는 저와 비교할 상대가 아예 아닙니다.
지난 달에는 한 달 가까이 주일마다
성당 옥상에 올라가 철제 십자가며 조형물들의
녹을 긁어내고 페인트 칠을 했습니다.
밑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딱 극단의 고소공포 높이..
현기증이 납니다.
저는 따라 올라가서 심부름만 했습니다.
고공 사다리를 잡아주기도 하고
이것 주세요 하면 주고
저것 주세요 하면 가져다 주고..
그런데 섭섭했던 것은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연세 지긋한 분들이 위험한 작업을 하고 있느냐
다치면 무슨 소라를 들으려 그러느냐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라…
등등의 이야기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도 나타난 젊은 사람들은
없더라는 것…
그런 말을 한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았고요.
아마 모두 바쁜 일들이 있었겠지요.
남편이 옥상 꼭대기에 매달려 위험한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 일을 힘들여 해준다거나 하는 것을
아내들이 보면, 모두 싫어한다네요.
게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교우가 아닌 사람들은
"하느님이 너무 하지 않니?
하느님을 위해 일을 했는데 복 대신 큰 부상을 내려?
그런 하느님이 어디 있나?"
틀림없이 그렇게 수군댈 겁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까지 책임져야 했던 토빗의 아내 안나는
이미 심기가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있는데
고생해서 얻어온 새끼 염소를
가만히 앉아 얻어먹으며 생활하는 남편이
훔쳐왔다고 오해하며 난리를 치니..
얼마나 미웠을까.. 안나의 넋두리가 이해가 됩니다.
안나는 하느님도 남편만큼 무척 미웠겠지요.
여기서도 하느님의 침묵은 분명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더 큰 일을 하시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도 유배지에서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일곱 번이나 남편을 잃는 불행을 당하고,
집안의 여종들은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라도 죽도록 괴로워합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옳게 살았음에도 어처구니없이 불행을 당했는데
오히려 세상이 그들을 모욕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잣대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굽은 자로 보면 똑바른 선도 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자선으로 얻은 것이 없다고 토빗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요?
남편의 죽음이 사라의 탓인지요?
문제는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자선이나 선행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소원대로 그들의 목숨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
그들이 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의 누님 두분도 모두 개신교 권사님들입니다)
연령회 활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죽는 순간,
이미 천국행과 지옥행이 결정되었다는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말씀 그대로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이들을 위한 어떤 행위도 가당치 않다.”
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때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었나요?.
부활 신앙의 기초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곤란을 주기 위하여 던져진 사두가이들의 질문이
<부활>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 덕분에 우리는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
생생한 희망을 얻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질문은 우리에게 이렇듯 답을 선사합니다.
무지하여 잘못 생각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단 한 분 스승>이 되어 주시고,
<정답>이 되어 주십니다.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의
'살아있는 날은' 이라는 시입니다.
폐암으로 오랜 투병 중인 수녀님은
암 환자로 살아오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쁘게 아프자.
기쁘게 싸우자,
수녀님의 신조라고 합니다.
그제와 어제 저는 저와 함께 기도하시는 분들과
병고로 고통 받는 분들이 주님의 위로를 느끼시도록
몇 개 성서구절을 소개하고 묵상하며
아픈 분들이 위로를 받으시도록 기도 드렸습니다.
나는 평생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나는 평생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나는 평생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내 안위보다 우선인 생활을 하여왔고
무엇보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예, 당신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여기서도
하느님의 침묵은 분명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싸일런스를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주님 왜 당신은 침묵하고 계십니까?
또한 오직 당신의 이름 때문에 피 흘리며 죽어간
조선의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을 생각하면서
주님 왜 당신은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며 절규했을 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오늘 저녁을 온전히 힘들어 하는 여러분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어머니의 아드님께 간구하시어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