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2021년04월21일)
오늘의 묵상(2021년04월21일)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때떄로 학생들이
몇 명씩 함께 살고는 했습니다.
그들은 1~2명일 때도 있었고
많을 때는 4명도 있었으며
대개는 1년 정도 함께 지냈으나
어떤 학생은 2년을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당신이 맡고 있던 학급에서
공부는 잘 하지만
집안이 너무 어려운 아이들을
우리와 함께 지내게 하셨지요.
어머니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셨는데
반가워하지는 않으셨지만
한 번도 우리 형제들과 차별을 두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들이 우리 집을 떠날 때
그들의 부모님들이
달걀 한 꾸러미나
닭을 한 두마리 사오시면
아버지는 잘 먹겠다고
사양하지 않고 받으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것을 사양한다면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으며
스승이 그 정도의 보은은 받아도 된다"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잘 못하면 김영란 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데..)
그 제자들 몇 명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년 명절 때며 아버지 생신 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교의 후배들을 위해
장학사업 같은 일들을 꾸준히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자랑을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속을 엄청
썩혀 드리기도 했거든요.
우리는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은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어제 묵상글에서도 말했듯이
부모가 주는 사랑의 양식 안에는
“너희도 주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뜻을
동시에 먹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만 먹는다고
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양식 안에 주는 이의 사랑이
들어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동물학자가 새끼 원숭이들을 나누어
한 쪽은 어미와 함께 자라게 하고
한 쪽은 어미와 격리하여 자라게 하는
실험을 하였는데
어미의 품에서 자라지 못한 원숭이는
성장해서도 무리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내어 줄 줄 아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자녀도 부모가 주는 양식에서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부모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부모의 뜻을 따를 마음도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고 하십니다.
믿으면
주시는 분의 사랑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천하게 되는데,
믿지 않으면
감사도 사랑을 실천할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신자가 성체를 모시고서도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성체가 진정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지 못하면
그분을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체는 그저 밀떡으로,
육체의 배고픔만 채우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성체성사의 은총을 누립니다.
(2021.04.21 미사 중)
슬픔 중에서 가장 어려운 슬픔은
내가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식과
곧 헤어질 수 밖에 없다...
라는 현실에 부딪힌
병고에 시달리는 환우이거나
그 가족일 것입니다.
사람은 어짜피 한 번은 죽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너무 빨리 찾아올 때
우리는 누구나 슬픔과 미련을 느끼며
회한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물며 암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
수반될 때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속에 숨을 거두심을 지켜보시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안은 성모님.
성모님의 아팠던 기억을 돌아보시고
이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