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12월12일 토요일 : 성인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드 샹탈 수도자
축일:12월 12일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드 샹탈 수도자
Santa Giovanna Francesca de Chantal Religiosa
St. Joanna Francisca Fremiot de Chantal
ST. JEANNE de CHANTAL
St. J.frences de chantal
28 January 1572 at Dijon, Burgundy, France-
13 December 1641 at the Visitation Convent, Moulins,
France; relics at Annecy, Savoy
Beatified:1751. Canonized:1767
Memorial:12 December; 18 August (United States); formerly 21 August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아내요 어머니였으며, 수녀인 동시에
수도 공동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지 18개월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나고
프랑스 디종의 국회 의장이었던 아버지가 그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섬세하며 성격이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성장했다.
21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샹탈 남작과 결혼하여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죽었다.
그녀는 자기가 거처하는 성에서 매일 미사에 참여했으며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도 신중하게 참여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한지 7년 만에 살해되었고,
그녀는 깊은 실의에 잠겨 친정에서 4개월 동안 있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그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75세의 노인으로 난폭하고 무례하며 허풍쟁이였다.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시아버지와 그의 횡포한 관리인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명랑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32세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만났다.
그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전임 영적 지도자가 그녀에게 부과했던
몇 가지 무리한 부담을 덜어 주었다.
그녀는 수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 결정을 연기하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수절할 것과 자기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했다.
3년 후에 살레시오는 건강 때문에 혹은 나이나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이미 설립된 기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여성 단체를 설립할 계획에 대해 요안나 프란체스카와 의논하였다.
그곳은 봉쇄 구역도 없고 자유로이 영적 일과 육체적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우선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덕행인
겸손과 온순함을 본받고자 했다.
여기서 그들의 이름인 ’방문회 수녀’란 말이 생겼다.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반대를 받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 수녀회를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에 따라
봉쇄 수녀원으로 만들어야 했다.
살레시오는 그들을 위하여 그의 유명한 저서’신애론’을 썼다.
이 수녀원은 세 명의 부인(마리파브르, 샤를론 브레샤르, 안느 코스트)으로
시작되었고 그때 요안나 프란체스카는 45세였다.
요안나는 크나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즉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죽고 그녀의 아들이 살해되었으며
전염병이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그녀의 며느리와 사위가 죽는 등
어려운 일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전염병과 희생자들을 위하여 지방 관리들을 설득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으며 병자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수녀원의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그녀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한때 커다란 영적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적 고민과 암담함, 영적 무미 건조함이었다.
그녀는 공동체의 분원들을 방문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내적 고민과 암담함,
영적 무미 건조를 느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놀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은 일반적으로 죄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영적 활력이 결핍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우리의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믿음 속에서 사는 것이며
때로는 어둠이 너무나 짙어 믿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울로 성인은 요안나 프란체스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일생 동안
그에 상반되는 생각으로 고통을 당했다.
외적으로는 그녀가 완덕의 높은 경지에 이른
영혼의 안락한 마음과 평화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애써야 할 만큼
온갖 종류의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가끔 나에게 말할 정도로
내적 시련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 모습은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요구한 충실함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지상에서 만난 가장 거룩한 영혼 가운데 하나로
그녀를 바라본다." (버틀러,’성인전’)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