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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2022년07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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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 안돼.’
‘내가 최고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격미달이야.’
‘감히 나를 비난해?”
“내가 누군데 감히 나에게 나를 무시하는 지시를 해?”
“이 자리를 다른 이에게 물려주라고?”
제가 화가 났습니다. 엄청..
몇 년 전에 지도 신부님의 지시를 받고
신부님이 정해주신 지침에 따라
어느 단체 구성원들의 활동을 바꾸도록 했었지요.
그 단체를 주도하던 이 사람은
그것이 치욕이었나 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가 최고이고,
다른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자기 발 밑이어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또 자기를 추종하는 그들을 통해서
제가 내린 지시를 취소하도록 읍소하기도 했지만
저는 사제의 뜻을 따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제의 결단은 제 생각과 같았으니까요.
코로나로 3년간
그 단체의 공식적인 활동이란 없었고,
제가 관여할 일도 전혀 없었습니다.
단, 사제 선종과 같은 교구의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연령회 연합회의 예하 단체에 알려서
이미 정해진 단체별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저와 그 단체와 그 사람의 관계 전부였습니다.
그 단체는 어쩌다 모임을 갖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모임의 시작은 저에 대한 성토로 시작되고
마지막에도 저에 대한 성토로 마무리 한다고..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저에 대한 감정이 에스컬레이트 되어
갈수록 저에 대한 감정이 더 나빠지고
증오하는 단계까지 왔나 봅니다.
저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저를 비난하는데 동참하게 된 것 같고요.
일종의 최면 효과?
물론 그 단체원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을 포함한 몇몇 리더들이 그렇다 보니
심약한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거의 궐기 수준까지 ..
저만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어제 비로소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입니다.
화가 치솟지만,
일단 제3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이니 만치
정확한 사실 파악이 될 때까지는
대응을 자제하고 지켜보려 합니다.
하지만 속된 말로 기분이 참 더럽네요.
누구와라도 소주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취하면 조금 기분이 풀릴까요?
소리라도 지르고 나면 속이 조금 후련해질까요?
아니면 조용히 기도하고 꾹 참으며
평상시처럼 지내야 할까요?
오늘은 막달레나 마리아 축일입니다.
복음말씀은 요한 20,1-2, 11-18로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가까이 지냈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막달레나의 슬픔 때문일까요?
아무튼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시신을 옮긴 장소를 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순간 바뀝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자 금방 알아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떤 신부님은 이렇게 해석하시더군요.
“마리아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아보았는데
부활은 눈으로 확인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은총의 가르침입니다.”
한동안은 그 신부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었었는데
되풀이 하며 생각했더니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부르셨겠지요?
사랑이 가득 찬 목소리였기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알아들었던 것일까요?
사랑이 밴 목소리로 부르면
누구나 응답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목소리로 부르고 계시겠지요.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그분께서 부르시는 목소리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꾸중이 아니라
애정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막달레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겠고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후에는 모든 사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기억 나십니까?
시인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이 우리들 이름을 불러주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주말 맞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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