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기억과 발자취/중국과 친해지기

[중국 근대사] 袁世凱의 한국인 부인들

주님의 착한 종 2015. 10. 20. 08:59

 

위안스카이는 슬하에 17남15녀 모두 32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과 함께 자리한 위안스카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부인은 하나지만 ‘이타이타이’(姨太太, 혼례를 올리지 않고 한 집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부인)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론이었다. 그에겐 부인 외에 9명의 이타이타이가 있었다.

부인 위(于)씨는 허난(河南) 지주집안 출신이나 문맹이고 신구(新舊) 예절도 몰랐다. 위안은 중화민국 대총통이 된 후 외국 공사들과의 첫 번째 접견을 위씨와 함께했다. 한 외교사절이 위씨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하자 위씨는 “꿱” 소리를 지르며 손을 뒤로 감췄다. 깜짝 놀란 위안스카이는 이후 그 어디에도 위씨와 동행하지 않았다. 장남 위안커딩(袁克定)이 위씨의 유일한 소생이었다. 커딩은 독일에 유학했고 영어도 유창했다. 위씨는 독일이 중국의 한 지역 명칭이고, 영어나 독일어도 중국의 숱한 방언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았다.

이타이타이 중 첫 번째인 다이타이타이(大姨太太)는 위안이 젊었을 때 도움을 준 기녀 출신이었고 둘째와 셋째, 넷째가 한국 여인이었다. 위안은 조선 말기 조선 주재 상무대표(駐朝商務代表)로 권세를 휘두를 때 양반집 딸 김(金)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김씨 집안에서는 하녀 둘을 딸려 보냈다. 이(李)씨와 오(吳)씨였다. 귀국 후 위안은 하녀들도 이타이타이로 삼았고 서열을 나이 순으로 정했다. 하녀 이씨가 둘째가 되고, 양반집 딸 김씨는 셋째가 됐다. 이씨는 4남2녀, 김씨는 2남3녀, 오씨는 1남3녀를 낳았다. 위안의 자녀 32명 중 15명이 한국인 이타이타이들의 소생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관 자녀들과 혼인했다.

위안의 차남으로 당대 최고의 골동품 수집가였던 위안커원(袁克文)은 김씨 소생이었다. 위안커원이 유산 한 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위안자류(袁家 )는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했고, 양전닝(楊振寧)· 리정다오(李政道)· 리위안저(李遠哲)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키워낸 “중국 물리학계의 제1부인” 우젠슝(吳健雄)과 결혼했다.

위안스카이의 손자 70여 명과 그 자손들 중에는 괄목할 업적을 낸 이가 많다.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대(代)를 이어 발전을 거듭하는 게 위안씨 집안의 특징”이라며 한국인을 할머니로 둔 위안자류·우젠슝 부부에게 덕담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