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마음/오 하느님

산티아고 수녀님

주님의 착한 종 2007. 9. 3. 16:05
           한국의 그늘진 곳 50년 보듬은 ‘천사 수녀님’
           필리핀 출신 산티아고 수녀, 일가賞 사회공익부문 수상자로 선정

31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필리핀공동체 사무실에서 만난
 
   미켈라 산티아고 수녀는
 
  “사진 찍는 것이 영 민망하다”면서도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내치지 못해
 
   포즈를 취했다.
 
   그는 당초 “아무런 한 일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뭐하냐”며
 
   인터뷰조차 사양했다.
  
 
   곽성호기자
“존경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평생 봉사 활동을 하시면서도 신의 존재를
 회의했다는 것은 그 지역이 인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비참하게 사는데 도와주는 이는 별로 없으니….
 
 한국에서 활동해 온 저는 그런 갈등을 느낀 적이 없어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참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필리핀 공동체에서 일하는 미켈라 산티아고(74) 수녀의
 목소리는 밝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병원환자들,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공로로
 오는 8일에 일가상(사회공익 부문)을 받습니다.
 일가상은 가나안농군학교 창설자인 일가(一家) 김용기(1912~1988) 선생의
 정신을 기려 제정한 것입니다.
 
 산티아고 수녀는 수상소식을 듣고, “아무 한 일이 없다”며 민망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필리핀 태생으로 만 24세에 한국에 온 이후 전국 각지에서 50년간
 봉사활동에 힘썼습니다.
 
 그가 아무 한 일이 없다면,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의 소명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문화일보가 그를 금주의 인물로 정한 것은 한국 사회의 격변을 묵묵히
 견디며 그늘진 곳에 기꺼이 자리해 온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 수녀는 모국에서보다 더 오래 한국에 살며 아프고 힘든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근년에는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왔지요.
 이는 다국적문화의 세계화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전히 자신을 한국인이 아닌 필리핀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필리핀 말은 거의 못합니다.
 한국말로 의사 소통을 하고, 때로 필요할 때 영어를 씁니다.”
 
 국적이나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서로 따뜻하게 어울려 사는 것,
 이것이 그가 평생 지향해 온 세상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살레시오 수녀회에 입회하고 싶어서
 수녀회가 있는 일본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교육이 끝나갈 즈음에 한국의
 교구로부터 요청을 받고 서울에 왔습니다.
 
 그때가 1957년.
 젊디젊은 필리핀 수녀에게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서울은
 미군부대와 빈민촌으로만 다가왔습니다.

 그는 서울 영등포 빈민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배곯는 아이들을 위해 미군부대에서 빵과 우유를 얻어다가 먹였고,
 영등포시립병원에서 빈민 환자들을 위해 밤낮으로 간호를 했지요.

 이후 경남 마산 자유수출산업단지로 내려가 살레시오 노동자 기숙사에서
 여공들을 위해 영어와 일본어,타자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여공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객지로 온 아이들
  이었어요. 월급 3만원을 받았어요.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서 중학교에 입학시키면, 월급이 7만원으로 올랐지요.”

  1970년대 초반엔 서울로 다시 올라와 영등포 신길동에서 버스 안내양 등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로했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주 노동자, 특히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그가 일하는 필리핀 공동체는 노동부 고용안정센터, 출입국관리사무소
  등과 연계, 외국인노동자들의 애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필리핀 출신 노동자들을 만나 상담을 합니다.
  기업체에 전화를 해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퇴직금 신청 등 각종 민원을
  대행해주는 것도 제 일이지요.
 
  제가 글씨를 막 써서 제출해도 관련 기관이나 업체에서 다 알아봅니다.
  워낙 많이 썼으니까요.(웃음)”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이 이주 노동자들을 착취하거나 이주여성을 학대하고 있다는
  내용이 외국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노수녀님으로부터 ‘질타’의 소리를 들을 각오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 “한국의 많은 지인들이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도와주기 때문에 힘든 줄을 모른다”며 웃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그늘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물론 신앙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온기를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성품도
 큰 힘이 되었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