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걸맞지 않게 일찍 출세(?)를 해서
서울 대교구의 부주교로 있었던 30대 후반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
나는 밤늦게 사무실에서 밀린 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됐을 무렵,
별안간 사무실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브라우스가 비에 흠뻑 젖어서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차림새의 젊은 여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
미국에 보내 달라고 조른 일이 있어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남자에게 쫓기고 있어요, 좀 도와 주세요!"
그 순간,
나는 나답지 않게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하면서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신부님, 무정해요!"
그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어떤 젊은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틀렸어! 가자 구!"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만일,
그 때 그 여자를 내 방에 들어오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여자는 분명히 젖은 브라우스를 벗었을 것이고,
남자는 창문으로 내 방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미인계에 걸려 들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지금쯤 신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가 순간의 일이다.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고인이 된 노 기남 대주교도 이와 비슷한 경우로
미인계에 걸려 고생을 했다.
본인의 큰 잘못도 없이 오해를 받고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이런 경우는 지위가 높으면 높을 수록
그 고통이 더욱 심해지는 모양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 대주교가 은퇴한 후에는 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사실은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다.
40여 년간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내게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었다.
신학생 때나 새 신부 때엔 제법 열심인 것도 같았으나,
6,25 동란 때 종군 신부로 사는 동안,
너무 바빠서 하느님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은 때가 있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과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로마에서 7년 간 공부하는 동안에는 논리적으로 따져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버릇이 생겼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머리로만 인식하는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귀국해서 63년부터 67년까지 서울 대교구 부주교로
명동성당에 있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하느님이 안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예 하느님 생각을
안 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쁜 때였다.
노 대주교와 함께 실각(?)을 하고 내가 본당신부로 처음
부임해 간 곳이 불광 동 성당이다.
명동에서 재직하던 근 5년 동안 하느님을 못 보다가
본당 강론 대에 서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해야 했을 때,
나는 몹 씨 당황했다.
안 보이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렇게 당황했을 때,
내 주의를 끈 성경 구절은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이었다.
즉,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해 주는 것과 같다는 교훈인데,
그 때부터 나는 불우한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배우려고 노력을 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서대문 시립병원 옆 구산동 산동네에 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판자 촌이었다.
또 그 때부터 나환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신나는 체험이긴 했지만,
그러나 늘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참으로 하느님을 만났다고 생각한 때는
천주교 2백주년을 기념하여 회개 운동에 가담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신부가 된 지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103위 시성 추진을 위하여 순교자 유해 순회 기도회를
주관하면서,
나는 큰 돈은 아니지만 개인 재산을 성가회의 자선사업에
몽땅 내어 놓았다.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에 하느님이 계시 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참 하느님'을 만난 것이다.
회갑을 지난 지도 몇 해가 지나갔다.
그럭저럭 40여 년 동안 신부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 내 신앙이 완숙 단계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은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에
흐뭇함을 맛보고 있다.
생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제복(祭服)을 입고
관(棺) 속에 들어가는 신부라면
일단 성공한 신부로 보여지리라 생각하며......,
- [치마 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김창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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