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오래된 기억을 헤집고 삽 한 자루 들고 바쁜 걸음을 옮기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버지의 일상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 찬 이슬을 맞으며 나가셔서 논을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을 살피고 들어오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비오는 날이면 그 손길이 더 분주해 지고 빗방울이 굵어지는 날이면 한밤중에라도 우비에 장화를 갖춰 신으시고는 삽을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논으로 향하십니다.
논들은 대부분 낮은 둑을 경계로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인 논 뿐 아니라 같이 붙어 있는 논까지 마음을 쓰고 살펴주는 것이 농부의 마음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낮은 둑의 흙을 한 삽 떠서 물고를 터 주어 벼들이 물속에 잠기지 않도록 살펴주고 날이 가물을 때는 조금의 물이라도 서로의 논으로 흘러가도록 마음을 쓰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는 적당한 때가 되면 서로의 물고를 막아서 벼가 익어가도록 합니다.
그저 흙 한 덩이를 치웠다 막았다 하는 일이지만 내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살림까지 챙겨주는 배려의 움직임을 비 오는 날 오래된 기억이 가르쳐줍니다.
가물은 날 야박하게 내 것만을 챙기겠다고 물고를 막는 마음은 아닌지... 서로의 생명들이 잘 자라도록 물고를 터주고 있는 마음인지... 그 배려의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내고 있는지 빗속에서 성찰의 마음을 펼쳐놓습니다.
비가 내려 부드러워진 마음에 이런 저런 방법으로 저희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분들의 사연을 심으며 기도의 물고를 터 봅니다.
바오로딸 홈지기수녀 드림. |